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문단 편집) == 내용 == 1985년 9월 9일, 국가안전기획부는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학교에서 만난 유학생인 양동화, 김성만, 황대권[* 서울대학교 농학 학사 출신이며 이 사건으로 복역(1985~1998)하면서 농학 학사답게 교도소 화단에서 야생초를 재배하고 먹기도 하는 등의 일상을 써서 보낸 편지를 엮은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야생초 편지'''. 저자의 풍부한 농학지식 이외에도 철학적 배경지식과 기독교 신앙 등을 바탕으로 한 성찰이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문서에서 다루는 사건에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편지에서 본인의 미국 유학 시절을 지나가는 듯 서술하기도 한다.], 재미교포인 이창신 등이 동아특위 해직자로 미국에서 해외한민보 편집인인 서정균이라는 사람에게 포섭되어 간첩이 된 후 한국에 들어와 극렬 학생에게 공작금을 주는 등 [[간첩]]으로서 활동했다고 발표했다.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은 길게는 65일 동안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불법구금 상태로 조사를 받았고 양동화와 김성만은 [[사형]]을, 황대권과 강용주는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등 1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강용주는 항소이유서에서 이 사건에 대해 국가안전기획부의 주장하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진술했다. 강용주는 양동화를 고등학교 동문 동아리에서 처음 만나서 가깝게 지냈으나 1984년 9월경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양동화를 만난 것은 평소 친분에 따라 오랜만에 귀국한 선배의 안부를 묻고 미국 생활을 상대로 삼은 호기심에서 그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려는 것이었을 뿐이라고 밝혔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가 주장하듯이 혁명을 획책하거나 무장봉기할[* 지배자의 무력에 대항하여 지배당하는 사람이 무장하고 떼 지어 세차게 일어나는 일.] 마음을 품은 적이 없고 그 사람에게서 어떤 것을 지령받거나 지시받은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강용주는 이 사건이 고문과 강압에 의해 조작됐다고 밝혀 주목된다. 강용주가 증언한 바로는 >"안기부에서 두 달 가까이 있으면서 폭력과 고문에 못이겨 그들이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다. 그들이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했다고 얘기하라'고 해 놓고 잠시 후 다시 질문을 했을 때 제대로 답하질 못하면 외울 때까지 때렸다...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자신을 돌아볼 때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위와 같이 말했다. 실제로 이런 사실은 구속된 다른 사람들의 항소 이유서에서도 드러나면서 사건의 조작 가능성을 상대로 삼은 의문이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특별히 미국 법원에서 이 시건과 관련된 재판 결과는 이런 의혹을 증폭시키기 충분하다. 대한민국 행정부가 발표한 이 사건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보도한 미주 발행 6개 신문사가 관련자의 [[명예훼손]] 소송으로 각각 15,000달러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1989년 2월 2일 미국 버지니아주 동부지방업원에서 나왔다. 당시 미주 총책으로 발표된 서정균[* 서정균은 간첩사실을 부인했다.]의 하수인이며 재미간첩으로 발표된 이창신은 법정에서 '나는 간첩행위를 한 일이 없으며 한국 정부가 조작해 나를 간첩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해 승소했다. [[http://blog.naver.com/partia/40014936913|출처1]] / [[http://www.poporu.co.kr/bbs/board.php?bo_table=P01_13&wr_id=23&page=32|출처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